양주동 박사의 - 향가 연구의 회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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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06-0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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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어려서부터 야망은 오로지「不朽의 文 章」에 있었으매, 시인․비평가․사상인이 될지언정「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 국학에 대한 관심이야 어렸을 적부터 없지는 않았었지만, 한글 공부 등을「취미」정도로 했을 뿐, 그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지 못했었다. 가르치고 글쓰는 여가엔 거리에 나가 길가에서 노인들․지겟군들과 함께 장기두기로 일과를 삼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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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아
어려 시골서 漢學만 공부하다가 3․1운동 직후「신학문」을 뜻하고 서울로 올라와 중학 1년간에 數學에 몰두했고, 다음 日東에 건너가 대학에선 어찌 어찌한 기연으로 서구문학에 심취, 豫科에선 불문학, 본과는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첫째, 우리 문학의 가장 오랜 유산, 더구나 우리文化(문화) 내지 사상의 현존 最古源流가되는 이 귀중한「향가」의 해독을 近千年來 아무도 우리의 손으로 시험치 못하고 외인의 손을 빌었다는 그 민족적 부끄러움, 둘째, 나는 이 사실을 통하여 한 민족이「다만 총․칼에 의해서만 망함이 아님」을 문득 느끼는 동시에 우리의 文化(문화)가 언어와 학문에 있어서까지 완전히 저들에게 빼앗겨 있다는 사실을 통절히 깨달아, 내가 혁명가가 못되어 총․칼을 들고 저들에게 대들지는 못하나마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자에는 약간의「天分」이 있어 맘속 깊이「願」도「熱」도 있는 터이니 그것을 무기로 하여 그 빼앗긴 文化(문화)유산을 학문적으로나마 결사적으로 戰取․奪還해야 하겠다는, 내딴에 사뭇 비장한 발원과 결의를 했다.
소창씨의 저서를 읽은 다음날 나는 우선 장기판을 패어서 불때고, 영․미문학서는 잠깐 궤 속에 집어넣어 두고, 상경하여 한글 古文獻 藏書家 여러분 故 一簑(方鍾鉉)․六堂, 一石(이희승)․가람(이병기) 諸氏를 歷訪하여 그 귀중한 문헌들을 한두 달 동안의 기한으로 빌었다. 그 뒤 10년간 쥐꼬리만한 영․미문학의 지식으로 칼라일․세익스피어․엘리어트 등을 講하는 한편, 문단에선 시와 평론과 수필과 번역을 그적거려 약간의 文名을 날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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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하여금 국문학 고전연구에 기연을 지어준 것은 일제중엽 문필에의 저들의 극단의 强壓에 의한 부득이한 학문적 전향이었으나, 직접적 동기는 日人 조선어학자 소창(진평)씨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1929)란 저서를 대함에서였다.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 온「경성제국대학 紀要 제1 권」이란 부제가 붙은 그 책을 빌어 처음엔 호기심으로, 차차 경이와 감탄의 눈으로 하룻밤 사이에 그것을 통독하고 나서 나는 참으로 글자 그대로 경탄했고, 한편 비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재학 중에 보오들레에르․키이츠에 흥미가 있었고, 한편 에머슨․지이드 등을 좋아했다. 대학 졸업 후 약관에 평양 S전문에 교수로 갔다. 참으로 태평閒日月의 消遣이었다. 한 가지 삽화-내가 그 책들을 빌어 큰 보따리짐을 만들어 등에 지고 아침에 낑낑 걸어 역으로 나가는 길에 鄭爲堂(인보)을 우연히 만났는데, 그는 내가 짐꾼이 되었음에 깜짝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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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 국보급의 장서들을 아낌없이 빌려주던 諸家의 厚意를 나는 잊을 수 없다.